[기자 수첩] 적십자의 붉은 십자가에 정치의 그림자를 드리울 것인가
대한적십자사 회장에 인요한 전 국민의힘 의원이 선출됐다. 아직 대통령 인준 절차가 남아 있지만, 의료계와 시민사회, 정치권에서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한 인사 갈등으로 보기에는 파장이 심상치 않다.
적십자는 정권의 산하기관도, 정치권의 전리품도 아니다. 전쟁과 재난, 생사의 경계에서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조직이다. 이 기관이 유지해온 가장 중요한 자산은 권력도, 예산도 아닌 ‘국민의 신뢰’다. 그렇기에 적십자 수장은 무엇보다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된다.
논란의 핵심은 능력이 아니라 상징성이다. 인요한 전 의원의 의료 활동과 봉사 이력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다. 문제는 그가 불과 얼마 전까지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이었고, 윤석열 정부 시기 여권 핵심 인사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계엄과 탄핵이라는 격랑 속에서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을, 가장 중립적이어야 할 자리로 보내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정치권에서도 우려가 나오는 배경 역시 여기에 있다. 이는 단순한 진영 논리가 아니라 공공기관의 성격과 상징에 대한 문제 제기에 가깝다.
특히 이번 인선은 시점 또한 좋지 않다. 최근 한찬석 민정수석 지명 논란으로 정치권에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또 다른 ‘정치적 인사’ 논란이 더해지면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모양새가 되고 있다.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 하락의 직접적 원인이 선관위 문제 등 외부 변수에 있다 하더라도, 민감한 시기에 이어지는 인사 논란은 민심 이반을 가속화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정치권 전반의 흐름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당대표 선거가 사실상 차기 대권주자 경쟁의 전초전처럼 전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사 문제까지 논란이 겹칠 경우, 국정 안정 대신 정치적 갈등만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이는 ‘내란당’ 프레임 속에 있는 국민의힘에 반사적 기회를 제공하는 역설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적십자 회장은 대통령 인준 대상이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국가가 공적 신뢰를 부여하는 마지막 단계다.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해온 ‘민주주의 회복’과 ‘국민 통합’이라는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이번 인선은 그 기준에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통합은 인사의 숫자로 완성되지 않는다. 특히 상징성이 강한 자리일수록 더 신중해야 한다. 사회적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아직 대국민 사과 한마디 없던 인물을 인도주의 기관의 수장으로 앉히는 것은 통합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균형이다. 대통령과 민주당 모두 인사 문제에서 한 번 더 신중해져야 한다. 작은 균열 하나가 정국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붉은 십자가는 정치의 색이 덧씌워지면 그 의미를 잃는다. 지금 이 인선이 남길 것은 인사의 성과가 아니라, 신뢰의 균열일 수도 있다.
| 제천 오운석 기자 |
오운석 기자 info11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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