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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전북신문

[제천 오운석 평론] 시간은 가족을 지나고, 계절은 마음..
문화

[제천 오운석 평론] 시간은 가족을 지나고, 계절은 마음에 물든다

오운석 기자 info1122@naver.com 입력 2026/08/16 18:53 수정 2026.08.16 19:19
-토방 마루에 앉아 달을 바라보던 소년이 노년인 나를 만나고
“물들 줄 알아야 버릴줄 알고 ..”- 비워져도 괜찮은

문청 오난희 시인(사진_굿모닝전북)

[제천 오운석의 평론] 시간은 가족을 지나고, 계절은 마음에 물든다
— 문청 오난희의 「세월」과 「가을앓이」에 대한 평론

들어가며

두 작품을 함께 놓고 읽으면, 「세월」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족과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시’라면, 「가을앓이」는 그 시간의 끝자락에서 ‘버림과 내려놓음,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찾는 시로 읽힌다. 특히 두 작품은 계절을 단순한 배경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소년에서 노년으로, 가족의 시간에서 자신의 시간으로 넘어가는 과정 자체가 시인의 내면 풍경이 되는 걸 보게된다-<주 제천>

평론
문청 오난희의 「세월」과 「가을앓이」를 나란히 읽으면 한 사람의 생애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천천히 펼쳐지는 듯하다. 두 작품의 출발점은 서로 다르다. 「세월」은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시작한다. 토방 마루에 앉아 달 뜨는 하늘을 바라보던 소년,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달을 품고 별을 바라보며 꿈을 꾸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소년은 어느덧 세월을 지나 중년을 넘어 노년의 문턱에 서 있다.

반면 「가을앓이」는 현재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괜시리 / 별것도 아닌걸로 / 시큰해진다”

가을이 오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진다. 그것은 단순한 계절병이 아니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기억이며,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고,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삶의 깨달음이다. 따라서 「세월」과 「가을앓이」는 별개의 두 작품이라기보다 하나의 긴 시간 위에 놓인 두 개의 풍경으로 읽을 수 있다.

「세월」 — 토방 마루의 소년이 노년의 자신을 만나는 시간

「세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처음에 등장하는 토방 마루다. 토방 마루에 앉아 달을 바라보던 소년. 그 소년에게 밤하늘은 단순한 밤하늘이 아니다. 달은 꿈이고, 별은 미래이며, 밤은 아직 살아보지 않은 무한한 시간이다. 어린 시절의 인간에게 시간은 길다. 내일도 있고, 다음 해도 있고,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날들이 있다. 그래서 소년은 달을 품고 별처럼 많은 꿈을 꾼다.

그러나 시는 어느 순간 그 소년을 현재의 자신과 마주 세운다. 여름을 지나가는 장맛비와 옥수수 수염을 적시는 풍경을 지나 어느 날 문득 중년을 넘어선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에서 계절은 곧 인생의 시간이다. 봄은 탄생과 성장이고, 여름은 삶의 가장 뜨거운 시간이며, 가을은 돌아봄과 성찰의 계절이다. 그리고 겨울은 끝이라기보다 삶이 조용히 자신을 정리하는 시간일 것이다.

그래서 「세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늙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어느 순간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놀라움이다.

“그때는 몰랐다.” 이 한마디에 인간의 시간에 대한 깊은 감정이 담긴다. 살아갈 때는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지지만, 지나고 나면 인생 전체가 한순간처럼 느껴진다. 어린 소년에게는 한없이 길었던 시간이 중년과 노년의 문턱에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세월」이 말하는 시간의 역설이다.

세월-제작 문청 오난희

가족의 사랑은 ‘등장’보다 ‘기억’으로 존재한다

「세월」에서 가족은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이라기보다 기억을 통해 존재하는 사랑에 가깝다. 토방과 마루, 장맛비, 옥수수 수염, 오래된 집의 풍경은 개인의 어린 시절을 넘어 가족이 함께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다. 특히 이런 공간은 현대적인 아파트의 실내와 다르다.

토방과 마루는 가족이 서로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공간이며, 아이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던 공간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회상하는 것은 단순히 ‘옛집’이 아니다. 그 집에서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꿈꾸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이 점에서 「세월」의 시간은 개인적인 시간이면서 동시에 가족의 시간이다.

한 사람의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 가족의 시간도 함께 흘러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순간, 그 시절 곁에 있었던 부모와 형제, 가족의 얼굴도 함께 떠오른다. 그래서 세월을 돌아본다는 것은 결국 사랑했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다시 만나는 일이 된다.

「가을앓이」 — 가을은 왜 사람을 시큰하게 만드는가

「가을앓이」는 「세월」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내면을 드러낸다. 시인은 가을 앞에서 이유 없이 마음이 시큰해진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곧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괜찮아요!” 이 반복되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겉으로는 자신을 다독이는 말이지만, 그 안에는 흔들리는 마음이 숨어 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할 만큼 마음이 괜찮지 않은 것이다.

가을은 사람에게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봄이 시작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지나온 것을 바라보게 하는 계절이다. 나뭇잎이 붉고 노랗게 물드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떨어질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가을의 아름다움에는 언제나 이별의 그림자가 있다. 「가을앓이」에서 시인은 바로 그 지점을 바라본다.

 ‘물들 줄 알아야 버릴 줄 안다’ — 삶의 가장 깊은 문장

「가을앓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다.

“물들 줄 알아야
버릴줄 알고 ..”

가을의 나뭇잎은 충분히 물든 뒤 떨어진다. 아직 푸른 잎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계절을 충분히 살아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내려놓는다. 
이것은 곧 인간의 삶에 대한 은유가 된다. 충분히 사랑해본 사람만이 사랑을 내려놓을 수 있고, 충분히 살아본 사람만이 삶의 어떤 것들을 놓아줄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무엇인가를 붙잡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도 붙잡고, 꿈도 붙잡고, 명예도 붙잡고, 지나간 기억도 붙잡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언젠가는 붙잡는 것보다 놓아주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그래서 ‘버림’은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충분히 살아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성숙한 결단이다.

빈 몸뚱이가 되어 바람에 나부껴도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버려진 뒤에는 ‘빈 몸뚱이’가 된다. 이 표현에는 쓸쓸함이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을 잃는다. 젊음도 잃고, 지나간 시간도 잃고, 사랑했던 사람과의 거리도 생기며, 한때 중요했던 것들도 하나씩 의미를 잃는다.

하지만 시인은 그 빈자리를 절망으로 끝내지 않는다.
오히려 “흘러 흘러 / 먼훗날 / 다시 피어날 / 나를 위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가을앓이」는 단순한 가을의 우울을 넘어선다. 버림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나뭇잎은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떨어진 잎은 땅으로 돌아가고, 그 땅은 다시 봄을 준비한다. 따라서 가을은 죽음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이것이 시인이 발견하는 삶의 순환이다.

‘괜찮아요’는 체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일으키는 말

「가을앓이」에서 “괜찮아요!”라는 말은 두 번 등장한다.
처음의 괜찮음과 마지막의 괜찮음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처음의 “괜찮아요”에는 흔들리는 마음을 달래려는 자기 위로가 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시인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이야기한다. 즉 마지막의 “괜찮아요”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삶을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인생에는 넘어지는 일이 있고, 버려지는 순간도 있으며, 빈 몸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시간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피어날 자신을 위해 버티겠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가을앓이」는 슬픔의 시에서 회복의 시로 변한다.

두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이다
「세월」과 「가을앓이」를 함께 읽으면 결국 하나의 질문에 도달한다. 세월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남기는가?
시인의 대답은 거창한 업적이나 명예가 아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 계절의 냄새, 토방 마루에서 바라보던 달, 장맛비와 옥수수 수염 같은 작은 풍경들이다.

인생에서 정말 오래 남는 것은 의외로 작은 것들이다.
어린 시절의 집 한 채가 오래 기억되고, 어느 여름날의 비가 기억되고, 함께 앉아 있던 사람의 모습이 기억된다.

그래서 가족 사랑은 「세월」의 표면에 크게 쓰여 있지 않지만 작품의 밑바닥에 흐르는 가장 따뜻한 정서라고 볼 수 있다.
사랑했던 시간은 세월이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년’에서 ‘나’로시인의 심리적 이동

두 작품을 하나의 연작처럼 읽을 때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화자의 심리 변화다. 「세월」의 화자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본다.토방 마루에 앉아 달을 바라보던 소년. 그 소년은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가을앓이」의 화자는 이제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젊은 시절처럼 무엇인가를 무한히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 있다. 따라서 심리의 흐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꿈 → 성장 → 가족과 삶 → 세월의 자각 → 상실 → 내려놓음 → 자기 위로 → 다시 살아갈 용기, 이것이 두 작품을 관통하는 내면의 여정이다.

계절은 바뀌지만 삶은 끝나지 않는다

두 작품에서 계절은 시간의 은유다. 여름은 젊음이고, 가을은 성숙이며, 겨울은 끝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가을에서 겨울만 보지 않는다.가을의 낙엽 아래에서 다시 피어날 봄을 본다.

이것이 「가을앓이」가 단순한 감상적 시가 아닌 이유다.
가을을 앓으면서도 가을에 머물지 않는다.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다시 피어날 자신을 생각한다.
따라서 시인의 ‘가을앓이’는 결국 삶앓이이며, 동시에 삶을 견뎌내는 힘이다.

가을앓이 - 문청 오난희

괜시리
별것도 아닌걸로
시큰해진다

괜찮아요!
괜찮죠...

모든 걸 내려놓고 나면
또다시 쌔싹처럼 자라나겠죠...

넘어져도 딛고
일어 설 만큼
성큼성큼
용기를 내볼께요...

물들 줄 알아야
버릴줄 알고 ..

버려져서
빈 몸뚱이..
바람에 나붓기 더라도

흘러 흘러
먼훗날
다시 피어날
나를 위해
또 버티는 게죠..

괜찮아요!


맺으며 — 세월을 견디는 가장 따뜻한 방법

「세월」의 소년은 달을 바라보며 꿈을 꾸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소년은 중년을 지나 노년의 문턱에 이르렀고, 어느새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건너왔는지를 돌아본다.

「가을앓이」의 화자는 이제 가을 앞에서 마음이 시큰해진다. 그러나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는다.
“괜찮아요”라고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낸다.

이 두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결국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시간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태도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흘러간다. 계절도 누구에게나 바뀐다. 
사람도 언젠가는 물들고, 떨어지고, 빈 몸으로 바람에 흔들린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충분히 물든 잎이 떨어져야 새로운 봄이 오듯, 사람 역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내려놓을 때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문청 오난희의 「세월」과 「가을앓이」는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세월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가져가지만, 사랑했던 시간까지 가져가지는 못한다.

그리고 가을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제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을 것인가.”

시인은 그 질문 앞에서 조용히 대답한다.
괜찮다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겠다고. 그리고 언젠가 다시 피어날 자신을 위해, 오늘도 조금 더 버티겠다고.

그것이 이 두 작품이 보여주는 삶의 깊은 풍경이다.

소년이 바라보던 달은 사라졌지만, 그 소년이 꾸었던 꿈은 아직 시인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계절은 바뀌었지만, 사랑은 세월보다 오래 남는다.

 

 

 

제천 오운석, 굿모닝전북신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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