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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전북신문

정천익과 남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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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익과 남승룡

이동우 기자 samerain@hanmail.net 입력 2021/11/24 09:25 수정 2021.11.25 09:16

[굿모닝전북=李同雨 편집국장/논설위원]


정천익과 남승룡

굿모닝전북 편집국장/논설위원(정치학박사 李 同 雨)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문익점’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문익점은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와 목화를 보급한 사람이다. 당시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것은 후대에 그의 업적을 추앙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덧붙여진 이야기로 추정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문익점이 ‘길가의 목면(木棉)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익점은 성리학자로서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 따스하게 입힐 방도를 찾아내면 그것이 선비의 길이라는 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필자의 관심은 그의 장인 ‘정천익’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목화씨앗을 우리나라로 가져온 사람은 문익점이었지만, 이 씨앗을 실제로 싹틔워 재배가 가능하도록 한 사람은 정천익이다. 그의 성공이 없었더라면 문익점은 우리 역사에서 그리 중요한 위인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정천익이 3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재배한 한 알이 발아하여 100여개의 씨앗을 맺었기 때문이다. 목화가 널리 퍼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족 권문세족과 왕족들만이 입고 덮던 솜이불과 솜옷이 시중으로도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 사람이 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 출전한 ‘남승룡’ 선수는 무명의 신인이었다. 조선 마라톤의 역사나 수준으로 볼 때 남승룡을 비롯한 우리의 마라톤 선수들은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둘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때에 남승룡은 일장기를 가슴에 단 채 올림픽 동메달의 주인공이 되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영웅이 될 수 없었다. 일장기를 달아서가 아니라 또 다른 기적의 주인공의 그늘에 가렸기 때문이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월계관은 양정고보 1년 후배이자 한 살 아래인 ‘손기정’ 선수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남승룡은 손기정이 받았던 세인의 조명 뒤에서 상대적으로 쓸쓸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 선수가 우승을 차지할 때 한국 선수단 감독은 손기정이었고 코치는 남승룡이었다.

당시 나이가 30대 후반이었던 남승룡 코치는 반강제로 임명되다시피 한 코치직을 버리고 현지에서 직접 선수로 뛰어 10위로 골인했다. 그러나 이때도 남승룡 선수의 의지와 도전 정신은 금메달을 차지한 ‘서윤복’ 선수의 빛에 가리고 말았다.

오래 전, 한 개그맨이 개그프로에서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를 퍼뜨린 일이 있었다. 어떤 대기업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 시리즈로 우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실제로 로또 당청금만 보아도 일등과 이등의 차이는 엄청나다. 로또가 아니라도 일등의 자리라는 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영광은 분명히 아니다. 일등의 차지하기 위해 흘린 땀방울의 가치를 폄훼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개그 프로그램이 던지는 메시지처럼 일등이라는 꼭짓점을 받치고 있는 밑변의 가치를 외면하는 현실이다.

정천익과 남승룡에게 세상은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누구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천익과 남승룡, 그들은 우리들에게 세상에는 1등보다 아름다운 2등, 더 빛나는 꼴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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