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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순 총경과 선교종 세미나 기념촬영(사진_동북교회) |
[굿모닝전북=오운석기자] 지난 11. 28 남원동북교회에서 개최된 '김억순경무관 충무무공훈장 수여 7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70년 간 역사속에 묻혀있던 '김억순'이란 인물과 남원동북교회(김범준 목사 시무) '선교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날 세미나는 동국대 겸임교수 원보현 박사, 남원문화원 김주완 원장, 남원시의회 전평기 의장, 이용호의원(남원,순창,임실 국민의힘)의 축사에 이어, 1부 경건회 시간에 장효수 남원시 기독교연합회장의 설교, 2부 발표시간은 정경호 한국기독교 사적협의회 부회장(익산 제석교회)의 사회로 약 2시간 40분 동안 5인의 발표가 이어졌다.
1강은 전라북도 재향경우회장 한기만 전 완산경찰서장의 "대한민국에서의 빨치산(파르티잔) 활동(시작에서 종결까지)에 대하여,
2강은 전라북도 자치경찰위원회 상임국장 방춘원 전 남원경찰서장의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토벌작전에서 작전과장 김억순 총경의 역할과 포상 이력". 3강은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 공동총장 김성철 전 전주대 교수의 "김억순 총경의 자녀로서 1953년 9월, 당시 상황에 대한 추억담", 4강은 남원동북교회 김범준 목사의 "남원동북교회 선교종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5강은 한국기독교 사적협의회 손산문 경북 자천교회 목사의 "남원동북교회 선교종이 가지는 신앙적, 사회적 의미"가 발표됐다.
3부는 질의 응답시간 순으로 이어져졌다.
[발표문 요약(1강~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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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만 전북도경우회장 발표(사진_동북교회) |
1강 한기만 전북도경우회장의 "대한민국에서 빨치산 활동의 시작과 끝"
빨치산의 의미
원래 유격대원을 뜻하는 러시아어지만 지금은 게릴라 전술을 위한 요원으로 통용되고 있다. 처음부터 빨치산이 공산주의자들을 의미하지는 않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유격대를 활용한 게릴라 전술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공산 게릴라를 연상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전후에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경남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등 3개 도에 걸쳐 지리산을 중심으로 회문산, 덕유산, 민주지산을 비롯하여 멀리 제주도 한라산 등 전국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공산 게릴라를 말하며, 주민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 빨치산을 모두 합쳐 빨갱이라 불리기도 했다.
빨치산의 태동
1950.9.13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던 북한군의 퇴로가 막히자 한반도 중간 부분과 낙동강 사이에 있던 북한군들이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조선인민 유격대 남부군단이라는 부대를 편성해 속리산지역을 거쳐 덕유산으로 들어와 지리산까지 들어오게 된다. 남부군단에 여순 반란사건에서 도주한 반란군 일부가 합류하고, 지리에 밝은 좌익세력과 연합하여 부대를 편성해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경찰서, 지서, 우익단체를 습격하며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빨치산이 태동하게 된다.
빨치산의 활동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 인민군이 후퇴한 이후에도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인 이승엽은 남한지역 6개 도당위원장 회의를 소집하여 유격대원들을 남부군으로 통합하고 이현상을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이현상의 이름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현상의 남부군은 1951.5.26 충북도 청주시내 소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의 수감자 1,452명을 석방하면서 후방 교란 작전을 펼치고, 그해 6월 초, 덕유산을 중심으로 무주 설천면, 영동 용화면, 상촌면, 경북 김천 부황면, 3도의 경계 민주지산, 인근 도시와 경부선 군용열차 습격하는 등 남한의 혼란을 부추기다 남부군 참모장이 사망하자 이현상이 이끄는 부대가 지리산으로 잠입하여 활동을 계속했다.
인민군 패잔병 2만여 명은 대둔산으로, 또다른 1만5천여 명은 태백산과 지리산으로 잠입했다. 남원의 경우 1950.9.23 전북 경찰부대의 수복과 진격으로 남원 시내는 수복되었으나 보절면 천황봉 일대는 지서와 마을ㅇ에서 빨치산의 기습과 약탈이 지속됐다.
당시 빨치산은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하게 무장되어 소름이 끼칠 정도로 3번씩 죽을 각오로 투쟁해 많은 양민과 경찰이 희생됐다.
빨치산 소탕
우리 국군과 미국 비행기의 지원으로 1951.3 순창 회문산에서 빨치산 소탕, 1952.10 동계 빨치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시행해 지리산 은거 빨치산 토벌에 성과를 올렸고, 1953. 5. 1 체계적인 빨치산 토벌을 위해 남원에 서남지구 전투경찰대가 창설돼 많은 성과를 거뒀다.
마침내 1953.9.18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 사살, 1954.4.5 전남 총사령부 사령관 김선우의 사망, 1955.4.1부로 지리산에 대한 주민들의 입산 통제 해제, 1963.11.12 경암 산청군 지리산 기슭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빨치산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생포되면서 13년간의 남한 내 빨치산 활동이 완전이 소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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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춘원전북도자치경찰사무국장(사진_동북교회) |
2강 방춘원 전라북도자치경찰 사무국장,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토벌작전에서 작전과장 김억순 총경의 역할과 포상 이력"
1953. 2월 초,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주재 내무부 장관을 비롯하여 국회 및 여당의 중진과 경찰 수뇌부 합동 후방 공비 완전한 섬멸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 후방 공비를 1년 이내에 평정할 것, 신설되는 전투경찰대는 군부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지리산에서 공비 토벌 작전을 수행할 것, 각 관내 도지사는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전투경찰 사령관에게 행정권을 이양하고, 공비 출현이 있을 경우 사령관에게 요청하면 즉각 출동하여 공비를 격멸할 것 등 결정했다.
회의결과에 따라 1953. 1. 4자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설치법에 의해 남원에 사령부를 둔 서남지구 전투경찰대가 설치됐다. 사령관 이하영 경무관, 참모장 노영세 총경, 예하에 전투연대로 편성, 3도 1시 12개 군의 전투와 치안을 담당했다.
경무대 회의 이후 5개월이 지난 7.14 사령부의 수뇌 인사가 이뤄졌다. 사령관 김종원 경무관, 참모장 최찬택 총경, 제5연대장 김억순 총경이 작전과장으로 제5연대장으로 정인주 총경이 발령됐다.
7.27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김일성은 남한 내부 공략을 행했던 남로당계에 대한 숙청을 시작, 박헌영 일당을 숙청했다. 박헌영의 숙청으로 지리산 지구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북한은 지리산 남로당계 제56지구당을 해체를 결의하기 위해 8.26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를 지리산 반야봉 빗점골에서 개최되어 제5지구당 결정서 제9호가 결정됐다. 요약하면, 제5지구당의 조직은 반당 반국가적이고 종파적으로 자기들의 간악한 목적에 복종시키려고 이승엽의 부하인 여운철로 하여금 1950.11.9에 남부지방 6개도의 당지도사업을의 권한을 위임했고, 또한 이현상 동지에게 상기 6개 도에 있어서 유격대들에 대한 통일 지도의 권한을 위임했으나 지금껏 불합리한 조직체 운영을 하면서 각 도당 단체들과 유격부대들을 사상적, 조직적, 전투적으로 혼란 약회시켜 사기를 저하 시켰으며, 전남, 경남 유격부대 거의 전부를 파괴에 이르게 하고, 각도당의 간부들을 남김없이 전몰하게 하였으므로 박헌영, 이승엽 반역도당에 대한 잔재와 영향(5비구당 포함)을 근절 청소함에 53.9.10까지 완료할 것을 이현상 동지에게 책임 지운다라는 내용으로 남부군 전체에게 6.25 전쟁 패배 책임을 물은 것이다.
남부군 총 사령관 이현상 검거자에게 1계급 특진과 상금을 수여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담화
서로의 공적을 인정받기 위해 군과 경찰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면서 9.4 제5지구당 부위원장 전속 의무관인 이행련을 생포하기에 이르렀고, 중상을 입은 이행련을 살리기 위해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은 갖은 노력끝에 죽음을 면하게 한뒤 취조했으나 묵비권으로 애로을 겪다가 차일혁 총경의 끈질긴 심문에 이현상이 아직 지리산에 살아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죽거나 월북했을거로 추측만 하던 경찰들의 눈에 생기가 돌면서 김익순 총경이 다시 이행련을 심문하기 시각해 이현상이 숨어있는 장소를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가리키자 반야봉 빗점골 부근에서 "당분간 머무를 것"이라는 답을 듣는다.
이 정보에 따라 2연대는 작전본부를 쌍계사로 옮기고 빗점골 일대를 3개 경찰연대로 완전 봉쇄해 놓고 수색대대를 매복시켜 이현상 생포계획을 세웠다.
작전 개시 이틀째인 1953.9.18. 11시, 제2연대 수색대와 전날 밤에 전투를 벌였던 곳에서 늙은 공비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이현상으로 밝혀졌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1905년 전북 금산군 금산면 외부리에서 400석 지기 지주인 면장의 아들로 태어나 박헌영의 4인걸인 이관술, 김상용, 김현선과 함꼐 조선공산당의 조직위원이었으며 한 때 남조선 인민 유격대 총수로서 지리산 일대를 피로 물들이는 악명이 높았던 인불이나 끝내 김일성의 도당과 이념으로부터 버림받아 우리 전투경찰대에 의해 사살됐다.
이현상 토벌 작전에서 김억순 총경의 역할과 그리고 '김억순 경무관 기념사업회' 필요
당시 2연대 소속 김억순 작전과장은 이현상의 은거 장소를 확인하고, 이현상 생포를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빨치산과 교전 중 이현상을 사살했다.
김억순은 1920년11월9일 함경북도 청진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부 중퇴하고, 1946년 11월 제1관구 경찰청 경사로 경력채용되어, 1951년 5월 치안국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작전과장으로 발령 받아 이현상 사살 후 1961년 1월 경무관으로 심사 승진 후 그 해 6월 치안국에서 의원 면직으로 퇴임했다. 그의 포상 이력은 훈장을 7회, 기장 7회를 받고, 표창은 대통령 표창 등 20회에 이른다.
작전과장 김억순 총경과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도 같은 해인 1920년 생으로 차일혁 경무관은 1958년 충남 금산경찰서장으로 재직 중 순직한 후 사단법인 차일혁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재직 중 공적을 확인하여 2011년도에 경무관으로 추서됐다. 반면에 김억순 경무관은 1961년 6월에 의원면직되어 2017년도에 소천하였으나 기념사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김억순 경무관의 기념사업도 추진되어야 한다. 아울러 김억순 경무관은 후에 기독교로 귀의하여 독실한 신앙인으로 살았으며, 장로의 임직을 감당하다별세했다.
오운석 기자 info11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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