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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전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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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70년 만에 깨어난 "선교종(鐘)", 그리고 "김억순 경무관"(3보)

오운석 기자 info1122@naver.com 입력 2023/12/15 17:08 수정 2023.12.15 18:01
- 2023. 11. 28 남원동북교회 역사위원회, 김억순 경무관 충무무공훈장 수여 및 선교종 문화재 지정 70주년 세미나
- 김성철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 공동총장, 김익순 경무관 장남의 추억담

김억순 총경(사진_굿모닝전북)

[굿모닝전북=오운석기자] 3보는 '1953년 9월에 있었던 일'을 김익순 경무관의 장남 김성철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 공동총장의 추억담으로 시작한다.

 

53년 9월에 있었던 일

 

9월 어느 날 아침 일찍 부친인 김익순 총경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상경 전에 남원역 건너편 소재 사령부에 잠깐 들른다는 기별을 받았다. 학교 가는 길에 남원역 광장 모퉁이 주차된 부친의 차가 보여 뛰어가서 보니 이종억 경사가 서 계셨고, 아저씨가 차량 뒤에 달려있는 트레일러의 군용 담요를 풀어서 보니 유리로 가려진 관속에 그 사람의 시체가 얼굴만 막아 놓은채 보였다.

 

모든 코, 잎, 귓구멍을 솜으로 틀어막았고, 입은 벌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금이빨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코 밑에는 카이저 수염이 보였다.

 

아버지 차는 서울로 출발해 밤늦은 시간에 한전 골목에 있는 국립경찰병원에 안치되었다. 그 후 중부경찰서에서 경찰병력이 출동해 감시체제를 갖추었다.

 

이튿날 이현상을 가까이 알고 있는 몇 분들이 이현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병원에 속속 도착했다. 기억나는 사람들로 사회부장관 출신 임영신 여사(전 중앙대학교 이사장), 국회의원 유진산 씨, 문교부 장관을 지낸 김법린 박사, 경무대 비서실장 윤치영씨 등이 이현상임을 확인해 주고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도 직접 와서 본다고 했지만 비서실장이 말렸다고 한다.

 

이현상이 워낙 거물이라서 국민적인 관심이 커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창경원에 효시했다. 9월이라 날이 무더워 서둘러서 공개를 끝내고 아버지는 다시 시신과 함꼐 남원으로 내려 오셨다. 

 

그날 밤 집에 두 사람이 찾아왔다. 김은석 황해도 사람, 김진영 개풍군 사람으로 이현상 작전 직전에 전향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작전 직전에 이 두사람으로부터 이현상이 달궁이 아닌 벽점골에 있다는 정보를 아버지가 확인했다. 이 두사람이 생포되기 전 인테리인 이형련을 구례에서 생포했는데 전남 광주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형련의 전향을 지속적으로 권고했지만 완강하게 버티었고, 그래서 광주에 사는 누나와 매형을 만나게 해주자 그때서야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형련에 의하면, 군경의 계속되는 작전에 쫒기어 빨치산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고, 위축되어 있고, 의약품의 부족으로 부상자들 치료가 불가능하고, 병사하는 빨치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겨울을 앞두고 식량을 확보할 수 없고, 남로당의 쇠퇴로 이현상의 내부 입지가 극히 불안정하다는 애기를 해주고 사망했다.

 

이현상이 사살되고 군인과 경찰간에 사살의 주체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경찰측은 18일 오전 11경, 갈매봉 방면으로부터 세명의 빨치산이 개인거리 10미터 간격을 두고 남하 중임을 확인하고, 15미터까지 근접시킨 후에 일제 사격을 하는데 이현상의 얼굴을 알고 있는 김은석이 "이현상이 저가 달아난다"고 고함을 쳤고, 김진영은 "선생님, 같이 삽시다"라고 소리를 쳤다고 했다.

 

70주년 세미나 기념촬영(사진_동북교회)

1953년 가을 어느 날 아침, 11시 5분부터 약 3분간의 교전 끝에 남부군의 신화는 종지부를 찍었다. 9월 18일 이었다. 사건이 종결된 후 상황수 한영환, 박재룡 두 아저씨로부터 뒷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현상을 잡았을 때 그의 바지는 사지(serge) 군복에 반듯하게 줄을 세워서 입고, 신발은 홍콩제 농구화를 신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그마한 호신용 권총이 있었는데 소위 떼떼총이라고 일컬어지는 소련제 권총이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상황이 종결된 후 경찰과 군부간에 본격적인 전공 다툼이 있었는데 결론이 나지 않자 경무대에서 경찰쪽의 손을 들어줘 일단락이 됐지만 대부분의 훈장은 군인들이 다 가져가 경찰은 전공에 비해 공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운석 기자 info11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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