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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전북신문

[수필] 배넷저고리..
(사)K-문학정담

[수필] 배넷저고리

오운석 기자 info1122@naver.com 입력 2023/04/09 10:31 수정 2023.04.09 11:24
- 배넷저고리를 입는 순간부터 인생이 시작된다
- 투르키에 전장에서 태어닌지 3시간만에 구조된 신생아, 배넷저고리라도 입혀주고 싶다

정정님 수필가(사진_굿모닝전북)

 

[수  필]

 

배냇저고리

 

장롱 속에 사십삼 년째 자리 잡고 있는 물건이 까칠하게 말했다. 

 

“도대체 우린 언제쯤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지? 답답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깟 사십여 년인데 뭘 그래? 난 칠십 년째 이러고 있는데. 그래도 우리를 관리하던 주인이 십 년 전쯤 잠깐 바깥 구경시켜 줬잖아.” 둘이서 옛일을 추억하듯 떠들어도 삼십팔 년 된 물건은 잠자코 듣기만 한다. 대화 속에 끼일 수도 없다는 듯.

 
하나의 생명이 잉태되어 세상 빛을 보는, 축복의 순간에 입는 첫 의례복. 이 옷을 입는 순간부터 인생이 시작된다 할 수 있겠다. 태어나서 처음 접하게 되는 고귀한 옷이라 함부로 버릴 수가 없어, 남편의 배냇저고리와 두 딸의 배냇저고리를 가방에 담아 골동품처럼 장롱 속에 보관하고 있다. 

 

칠십 년 전 시어머니도 그러셨을 것이다. 장남의 배냇저고리를 없애지 못하고 나에게 전해주셨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두 딸의 배냇저고리와는 달랐다. 한 땀 한 땀 손바느질해서 시할머니가 만들었다는 첫 손주의 배냇저고리는, 무명천에 옷고름 대신 무명실을 여러 겹 꼬아서 노끈처럼 만들어져 있다. 실을 꼬아 옷고름을 만드는 것은 아기의 무병장수와 행운을 뜻하는 것이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실밥 하나 뜯어진 곳이 없다.

 

두 딸의 배냇저고리는 보드라운 융으로 되어 있고 바느질도 손바느질이 아닌 기계로 만든 것이다. 요즘은 세월의 흐름에 맞춰 배냇저고리의 모양도 다양하게 변해있다. 아기의 손이 얼굴에 상처 줄까 봐 손 싸개가 달려있다. 그리고 미리 지어놓은 아기의 태명과, 태어나는 해의 띠별로 동물 그림을 수놓은 귀엽고 예쁜 모양으로 만들어진 옷도 있다.

 

남편과 두 딸의 배냇저고리는 십여 년 전 깨끗이 빨아 따뜻한 햇볕에 말리고, 선선한 바람까지 쏘여 가방에 잘 넣어뒀다. 요즈음 꺼내보니 젖과 우유가 묻어있던 부분은 여전히 누렇게 얼룩져 있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더 넓어 보이는 작은 옷 속에 아기의 몸이 들어갈 수 있다니, 볼수록 신기하다. 신생아였을 때는 몸이 이렇게 작았을까?

 
옛날에 어려운 시험을 보거나 재판을 하러 갈 때에, 배냇저고리를 몸에 지니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행운이 따르고 재수 있는 옷이라 믿어, 시험에 합격하거나 재판을 이기는 좋은 결과가 있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유명 연예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져가라고, 40여 년간 간직한 본인의 옷과 물건들을 내놓은 것을 봤다. TV에 나온 그 사람은 유명한 연예인이라 인지도가 있어, 그가 내어놓은 물건은 누구라도 빨리 가져갈 것이다.

 

오래되었지만 깨끗하고 쓸 만해도 배냇저고리는 누구를 줄 수가 없다. 장롱에 있는 가방 속이 답답하다는 두 딸의 배냇저고리는 이제 본인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혼자 남아있는 남편 배냇저고리가 외롭지 않을까?

 

시리아 폐허속 신생아 구조(사진_자료)

얼마 전 튀르키예와 시리아에 엄청난 지진이 났다. 

 

날마다 몇 천 명씩 사망자가 늘어나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곳. 아비규환 속에 200여 시간이 지났음에도 생존해 있는 사람들, 잔해 속에 묻혀 꺼내지도 못하고 이미 숨진 딸의 손을 놓지 못하는 아버지. 넋을 잃은 채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애잔한 눈빛이, 너무 가슴 아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다.

 

더구나 무너진 건물 속에서 간신히 숨만 쉬며 축 늘어진 채 구조된 신생아는, 전 세계 사람들의 놀라움과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구조 당시 태어난 지 3시간쯤 되었다는 이 아기는, 아기를 지키기 위한 엄마의 필사적인 보호 속에 살아있는 것이라 했다. 비록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엄마도 아기가 무사히 구조되었음을 믿고 있을 것이다.

 
한 생명이 신비롭게 잉태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도 신의 뜻이라 했다. 이 신생아는 세상을 암흑으로 만들어버린 자연재해 속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차디찬 몸으로 세상과 마주했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정말 신의 뜻이었을까? 극단적인 상황에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혹한에 울지도 못하고 퍼렇게 질려있는 아기를 보는 순간, 우리 집 장롱 속의 배냇저고리가 생각났다. 옆에 있다면 두 겹 세 겹 감싸서 따뜻하게 꼭 안아 주고 싶다. 아니 마음은 벌써 따뜻한 배냇저고리에 싸인 아기가 내 품 속에 와있다. 

 

아기의 엄마도 아기가 태어나면 입히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배내옷을 준비해 두었겠지. 두려움 속에 생을 마감한 아기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속에 뜨거움이 차올라 눈물이 솟는다.

 

필자 부군의 배넷저고리(사진_굿모닝전북)

[수필가 정정님]

 

- 전북 부안 출생
- 2019년 《수필과비평》 <민달팽이의 집> 신인상 수상
- 아람수필문학회 회원
- 수필집 : 《어떤 선물》


오운석 기자 info11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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